소리, 자두, 조각2023~2024텍스트, 출판 프로젝트
<소리, 자두, 조각>은 난청으로 겪게 된 소리 현상들과 사변들에 대한 텍스트 베이스 프로젝트이다. 작가는 난청을 진단 받은 후 자기 몸을 설명하려는 기존 체계로부터 한계와 소외를 느껴왔다. 근대적 사고에서 분별될 수 없는 소리를 겪는 몸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자기 몸의 감각에 집중해 근대적 틀을 벗어난 탐구를 시도한다. 작가의 소리 세계에서, 모국어는 잘 모르는 외국어를 들을 때처럼 흘러가버리고, 동물의 짖음, 기계의 소리와 뒤섞인다. 이때 작가는 소리라는 현상이 그 근원의 존재론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지며, 우리가 소리를 경험하는 방식이 구조화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존재를 구별 짓고 위계질서를 만드는 것으로서 언어를 탐구한다.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소리와 생각들이다. 담론체계나 언어체계를 통해 안정적으로 포획될 수 없는, 그에서 비껴 있는 작고 연약한 것들. 작가는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날 것의 소리와 생각들을 언어라는 형태로 고정해두고 덩어리처럼 응시한다. 덩어리는 마치 공간에 놓인 조각sculpture처럼, 볼 때마다 다른 이미지와 사변으로 이어진다. 책 후반부로 향할수록 중심소리와 주변소리가 뒤섞이고 경계가 허물어진다. 인지 세계에서 배제된 것들, 오작동한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응시된다. 비극의 무대는 새로운 존재론적 감수성으로 창발하는 곳이 된다. 깨진 조각을 탐사하는 컨셉으로 진행되며, 40개의 짧은 조각글로 구성되어 있다. ‘깨진 조각’과 ‘느낌표’를 모티프로 한 디자인은 ‘부서져가는 것에서 피어오르는’ 책의 접근법을 시각화해 유기적인 재미를 준다.
저자 정승은 디자인 정승은 출판 오다도 제작사양 120*180mm, 252쪽, 무선제본 초판 1쇄 발행 2024년 7월 22일 ISBN 979-11-987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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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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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부서져가는 것으로 피어오르기 (조각군 1~5) 2부 균열들, 세계들 (조각군 6~10) 3부 원시와 체계 (조각군 11~15) 4부 오만함, 트랜스, 진실 (조각군 16~25) 5부 미지를 향한 경청 (조각군 26~40) 해제
《소리, 자두, 조각》은 난청에 대한 자전적 경험에서 시작했다. 좋아하던 노래가 더 이상 좋아하는 방식으로 들리지 않는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알던 것과 다르게 들리는 순간, 무언가 깨졌다. 깨진 조각을, 낯선 소리 현상을, 의문, 감정, 사변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문자로 쓴다. 쓴 문자를 바탕으로 또 무언가가 깨어진다면, 그것을 다시 문자로 쓴다. 다시, 다시, 다시... 이것이 이 프로젝트가 진행된 방식이다. (해제 중) 비인간에 대한 관심 ... 많은 이에게 점이나 선은 그저 점이나 선일 뿐이다. 또는 많은 경우 인식되지 못하고 지나쳐진다. 그러나 조형요소를 다루는 이들은 조형요소가 발휘하는 에너지에 민감해진다. 그들은 조형요소가 발휘하는 에너지에 노출되고 휩싸여 앓은 적이 있는, 피폭된 신체이다. 나는 서체를 보며 귀여워 하고, 때론 극도로 불쾌해 하고, 때론 슬퍼서 운다. 때론 그것이 너무 아름다워서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은, 사회학 전공수업에서 양적 자료가 코딩 프로그램을 통해 뚝딱 그래프로 만들어졌을 때였는데, 나는 도출된 그래프-점과 선들이 배치된 조합-가 너무 대견하고 귀여워서 한동안 앓았다. “너무 귀여워!!!” -마치 귀여운 털뭉치 생명체를 만났을 때처럼. 주의할 점. 이토록 극심한 정서적 변동을 일으킨 것은 사람도, 귀여운 털뭉치 생명체도 아니었다. 심지어 연필이나 목탄으로 그려져 물질적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화면상에서나 존재하는- 그래픽에 불과한 것. 단지 선이나 점일 뿐인 것. 그것이 그토록 나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이 일련의 경험으로 내 안에 있던 물음은 더 커졌다. 실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완전히 구분될 수 있나? 실체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내 안에 이토록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내면의 파장이 이렇게나 커다랗게 실재하는데! 이게 어떻게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있지? 이게 실체가 아니면 뭐야, 가짜라는 거야? 나는 학문적으로 구획된 개념이나 그 안에서 사고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다. 풀리지 않는 의문, 회의감 같은 것이 있었다. 2022년 가을 라투르에 대한 강의를 들었고, 생기적 유물론, 객체지향존재론, 화이트헤드 등을 알게 되었다. 이들이 말하는 ‘비인간’이라는 개념은, 그간 여러 경험을 통해 인간이 아닌 것들이 배제되던 사고체계에 답답함을 느꼈던 나에게 어떤 충족감을 주었다. 내가 귀여워하던 점, 선- 그들을 ‘비인간’으로 학문 안에 포획해 들어올 수 있다. 그들은 행위능력을 가진 비인간이야! 내가 그들에게 마음이 동한 것이 그들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내 안에서 부글부글대던 것들에 길이 하나 생긴 것 같았다. 그것은 훌륭한 부표로서, 새로운 담론들의 세계로 나를 데려다주었고 나는 새로운 세계에서 유영했다. 기존의 학문 담론에서 희미해지던 나의 감각은 이 세계로 넘어와 활기를 띠고 예리하게 떠들었다. ... 한편으로 내가 공유하는 지각 조건 이상으로 코드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 가로막힘. 타종과의 관계에서 갖게 되는 견고한 벽. ‘ 난 너를 존중하고 싶어, 그런데 우린 너무 다른 존재야, 널 알 수 없어, 어쩌지? 하고 가로막히는…’ 인간중심적 경험, 근대적 지각체계에서 탈중심화하는 것이 인문사회•예술계가 현재 당면한 과제인 것처럼 보인다.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지만 타종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는지 닿을 길이 없기에, 그것은 중대하나 막연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나의 소리 현상들을 보면- 한국어가 외국어 같이 들리고, 또 그게 어떻게 보면 개의 짖음 같기도 하고,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견고한 벽이 없어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소리 현상이 나를 스쳐갈 때, 통상적인 앎으로 설명할 수 없는- 번뜩임. 찰나의 반짝 하는 그 번뜩임은 새로운 세계로의 통로 같았다. (해제 중) 나의 소리 세계는 온갖 크고 작은 사건들로 떠들썩하다. 뻔한 물체에서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듣거나(현관문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 알던 노래가 알던 것과 다르게 들리고(그 노래에 대한 나의 앎을 파괴한다), 나의 반려(?)인 보청기에 의해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사건들- 아무런 앎으로도 포획되지 않는, 미지의, 충격의, 안심할 수 없는, 가끔은 섬뜩하고 무섭기까지 한- 날 것의 삶의 물질 덩어리가 “네 거야.”하고 쿵 떨어져 내 눈앞에 놓일 때. 죽지 않고 파닥이는 물고기처럼, 징그럽고 생생한 활력- 삶은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을 가지고 돌아온다. 삶의 맛은 새그럽다. 나는 소리 세계의 사건들, 미지의 물질 덩어리들을 쓴다. 온통 새그러운 자두맛과 짜운 눈물맛이 난다. 이 덩어리들은 내가 알던 세상에 구멍을 냈다. 구멍. 당신의 집 지붕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해보라. 빗물과 벼락, 새의 침입… 그러나 어떤 수를 써도 구멍을 메울 수 없고 그 집을 벗어날 수도 없다. 당신은 이 생이 다할 때까지 구멍이 난 집과 살아가야 한다. 도대체 왜 구멍이 뚫린 건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건지 이런 삶을 지속하는 게 의미가 있는지. 구멍을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본다. 그러다 아까 볼 때랑 달라진 부분이 있는데…, 관찰하고. 왜 그런 건지를 생각하다보면 당신은 처음의 격렬함과 비극에서 한결 비껴 서 있다. 난청에 대한 경험들은 소리와 인지를 비롯한 나의 관심과 만나서, 좌절에서 의문으로 흥미로움으로 변해갔다. 나의 소리 경험은 언어, 비인간, 사이보그를 비롯한 여기저기로 흩어져 무엇들을 깨뜨렸다. 내가 알던 세상의 법칙들이 부서졌다. 구멍은 연쇄적으로 더 많은 구멍을 만들었다. 나의 구멍들. 나의 구멍들은 여기저기 너무 많이 나서, 이제 그것들을 구멍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지붕의 깨어진 ‘조각들’이라고 부르는 게 나아 보인다. 소리에 관한 파상들, 직접 겪은 것들, 감각과 인지에 대해 자연히 떠오른 사변들…, 나는 그들을 분류하지 않고 무게를 가진 물질처럼, ‘조각’으로 대한다. 작고 뾰족하게 흩뿌려진 조각들을 본다. 여기저기의 조각들이 빛을 난반사하며 있다. 앎의 끈끈한 조직력에서 벗어난 세계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광활하다. 나는 두렵고. 이따금씩 도망치고 싶지만. 그 세계는 매일 예측없이 찾아온다. 나는 더 공부해서 확장된 앎을 가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현상학, 생기적 유물론, 객체지향존재론(OOO), 행위자네트워크이론(ANT) 같은 것들이 나의 조각들에 일련의 질서를 부여해주길 바라는 욕망- 나는 개념이 내 경험을 절단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관심이 가는 이론을 보기도 했다. 나의 이야기는 현대철학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왔고 도움을 받았다. 여기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는 선행 이론과의 비교나 그 언급을 통한 서술을 최대한 지양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론과 논리, 정합성에서 벗어날 때 가능한 새로운 시선이다. 나는 나의 사변들을 말하지만 정리된 이론으로 말하기를 목표하지 않는다. 소리에 관한 파상적 경험들은 객관적으로 분석되기보다- 최초의 인류, 동물들의 대화, 냉장고와 머리카락의 존재론과 같이 터무니 없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나는 자유롭게 말한다. 내가 하는 이야기에는 ‘단 하나의 객관적인 진리’에 대한 의지나 믿음이 없다. 나는 모든 실재에 적용되는 법칙을 밝혀내려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밀함과 객관성에 대한 요구의 바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이 글 전체에 걸쳐서, 나는 그 가능성을 탐색한다. 무수한 파상들을 앎의 세계로 포획해 가져오는 대신, 그저 바라보려는 시도. 나는 앎의 세계에 난 구멍을, 구멍이 만들어낸 깨진 조각들을 쓴다. 말로 울퉁불퉁한 표면과 비정형의 모양을 빚어낸다. 그들은 햇볕에 그을려 색이 고르지 않고, 어딘가 부서져 부스러기를 흘린 채 있다. 그들은 공간에 놓인 조각sculpture처럼, 보는 이와 연결되어 저마다의 인상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조각과 당신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 그리하여 나는 그들이 당신의 감수성을 적시고 신체의 온갖 끝부분들에서 -턱선, 손끝, 머리칼 끝, … -얇고 투명한 물방울로 떨어지기를 바란다. 좀처럼 다르게 보이지 않는 세계에 새로운 시선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 이것을 읽은 당신이 어느 날 문득, 시선이 닿은 무언가에서, 그 뻔한 이름 너머- 순식간에 스쳐가는 수상한 움직임을 감지해보는 순간을 희망한다. (조각군4) 조각들을 꼭꼭 씹어 소화하는 것은 위험할 것이다. 그보다 거리를 두고, 조각의 여러 면을 내키는 대로 응시하길 바란다. 조각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도에 따라서, 시각에 따라서, 마음에 따라서 다른 인상으로 보일 것이다. 그 인상들은 당신 고유의 조각에 부착되거나, 당신의 조각에 의해 깨어져 새로운 조각을 만들 것이다. 내가 빚어낸 조각들 옆에 당신의 비판과 사변들이- 다양한 조각들이 눕길 바란다. (조각군5 중) 보청기를 써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청기는 단어 뿐일 것이다. 나는 난청을 진단 받은 후 2022년 봄부터 보청기를 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물건을 사서 지니는 것 이상의 경험이었다. 물건을 ‘사용’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또는 개, 고양이와 ‘반려’하는 삶에 가까웠다. ... 또 다른 요인을 말하기 위해서, 나는 그 고액의 가격, 그에게 느낀 전율에도 불구하고 두 번째 보청기를 새로 맞이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다. 첫 번째 보청기를 잃어버렸거나 고장이 났거나 한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첫 번째 보청기와 반려생활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건 그와 같이 지내는 게 너무 불편해서 ‘더 이상 함께 살지 못하겠다’는 결정이었다. 우리는 잘 맞지 않는 한 쌍이었다. ... 하루는 병원에서 보청기가 높은 음을 더 크게 내뿜도록 설정하고 돌아오는데, 보청기가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옆쪽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거나 심지어 바람이 불어와 보청기를 스쳐도 소리를 냈다. 보청기는 찡찡거렸다. 장난감을 사달라며 마트바닥에 드러누워 온 몸을 비트는 다섯 살 아이처럼. 보청기는 으르렁댔다. 사나운 맹수처럼. 심지어 얼굴을 기울였을 때는 한 번의 찡찡에 그치지 않고 파바바바바바ㅏㅇ 파바바ㅏㅏ바방 하는 소리를 냈다. 앰비언트 사운드 같기도 한 그 소리는 내가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또 유난히 특정 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는데, 카페에서 음악이 나오고 있으면 꼭 드럼 구성 중 어느 하나에 기민했다. 음악에서 그 드럼이 두드려지는 박자마다 보청기가 울렸다. 그 음악이 n개 악기들의 n중주라면 내가 경험하는 건 (n+1)중주였다. (조각군9 중) 내가 듣는 것은 ‘배’ 같기도 하고 ‘해’ 같기도 하고 ‘개’ 같기도 하고 ‘대’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소리, 그 모든 것이 뒤섞여 있으나 그 중 무엇 하나가 되기엔 모자란 소리이다. 그것을 어떻게 내뱉을 것인가? 그건 마치 발음구조가 전혀 다른 언어의, 제대로 발음하기 힘든 미지의 음운 같은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어떻게 발음해도 그 소리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정체 모를 외국어이며 개나 고양이의 짖음이다. 내 언어체계로 포획될 수 없는 소리이다. (조각군11) 그러다 나는 이 애매모호한 소리들을 ‘미(未)어(語)’라고 명명한 후, 내가 느끼는 이 바보 같고 곤란한 상황을 명확히 파악하기를 시도한다. ‘미어’는 소리다. 상대방의 의미가 담긴 말소리라는 것을 알지만 나에게는 포획되지 못하는 소리. 내가 아는 음운으로 읽히지 않아서 따라 말할 수 없는 소리. 그래서 언어로 오지만 언어로 닿지 못하는 소리. 분화되지 못한 소리. 원시적인 소리. 미어는 낯선 외국어와 같은 처지에 있다. 마치 발음체계가 완전히 다른 언어처럼, 당신의 안면근육과 성대근육은 그 소리를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소리를 생각하고 소리를 내도 그것이 아닌, 모국어 음운과 가까운 소리를 내고 만다. 그 소리(미어, 외국어)를 내고자 하는 당신의 의도는, 성실히 훈련된 근육들의 퍼포먼스 영역에서는 힘도 쓰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다. 의사의 다그침과 나의 완고함 사이에서, 나는 나의 근육들이 그간 아주 성실히 훈련해왔음을 깨닫는다. 모국어 음운들을 내도록 성대를 조이고 근육을 움직이는 훈련을. 훈련의 결과로, 나의 근육들은 모국어 음운을 표현하는 데에 얽매여 있다. “모르는 음운으로 들려서 흉내낼 수 없어요. 이건 선생님이 모르는 언어의 음운을 구별해내거나 흉내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말이 빨라도 훈련된 언어는 붙잡을 수 있다. 마법처럼, 당신은 의미를 이해하고 대답까지 해낸다. 훈련되어 있지 않은 언어는 쏜살같이 흘러간다. 바람처럼, 당신은 그것을 잡을 수 없다. 누군가의 입에서 여러 음운들이 쏟아져나올 때, 나는 뭉게뭉게한 미어 안개 사이에서 뭉툭한 부분이 조금씩 다른 미어의 음운들과 만난다. 그들은 그것을 잡아낼 아무런 망을 갖고 있지 않은 나를 바람처럼 스치고 떠난다. 언어는 미분화된 공기의 흐름 속에서, 무언가를 구분해내게 하는 자의적 규칙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청력 손실은 음운 구분에 결정적인 소리의 특징들을 감지하지 못하게 하고, 따라서 모국어의 음운조차도 언어로 감지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훈련해왔던 음운들은 내게 희미하게 들려 미어로 분류되는 희미한 음운이 되지만, 나는 그 음운을 구분할 어떤 훈련도 되어 있지 않다. (조각군12) 단어는 각자의 영역을 지닌다. 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추상세계의 다차원 영토이다. 사전을 살펴보면 하나의 단어엔 뜻이 많다. 첫번째 뜻에서 변용된 의미들(다의어). 나는 의미들을 유심히 보면서 의미들의 교집합을 떠올린다. 의미들의 합집합도. 교집합에서 멀어질수록 투명도가 조금씩 증가하는 의미 영역-. 의미들은 서로를 향해 범람하고, 미끄러지며- 차원을 거슬러 뛰어오르고, 침잠해 잔잔해진다. 나는 그 의미 영역의 이미지들을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을 즐긴다. 나는 단어를 수집한다. 서로 다른 언어에서 단어들은 서로와 완벽히 일대일대응하지 않는다. 단어의 구획은 조금씩 어긋난다. 비슷해 보이는 단어들도 두세번째 이후의 의미를 보면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향하곤 한다. 가끔은 어떤 언어에만 있는 단어도 있다. 바로 이곳이 내가 관심을 가지고 맴도는 지점이다. 모국어에 없는 단어를 다른 언어에서 발견할 때, 그 단어가 지시하는 감각을 향해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선다. 느슨하게 알고 있던 -사실은 알지 못하고 바람처럼 스쳐보냈던- 감각이 명료해진다. 내 안에서 새로운 주제•재료(matière)가 떠오른다. 부표가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듯, 의식 위로 둥둥. 이제 나는 또 하나의 자석을 가진다. 나의 새로운 단어는 흘러가던 실오라기 바람 같은 생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 이제 나는 이 단어가 지시하는 감각과 세상을 적극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 나는 새로운 자력을, 자기장을 가진다. 세상은 이 단어에 의해 새로이 배열되고 감각된다. 새로운 사실이, 새로운 앎이 건져올려진다. 단어를 향한 나의 열정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생의 감각에 면밀히 가닿고자 하는 욕망. 단어가 분절하고 삭제한 생의 감각을-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더 많은 단어들을 통해 회복하려는 기획. 나는 늘 세상을 향해 더 많은 촉수 돌기를 갖고 싶었고, 더 기민하게 생의 감각을 끌어당기고 싶었다. 그래서 언어와 언어 사이의 조그만 어긋남을 바라보고, 그 틈새의 의미 영역을 탐사한다. 미묘하고. 빛무리지는. 그 작은 공간에 우연히 도달하게 될 때. 나는 그곳에 멈추어 서서, 고요하고 빛바랜 그 자리에서 이는 먼지의 소용돌이를 본다. 이 의미에서 저 의미로 자연스레 튀어간 이의 머릿속을 생각한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인식이, 어떤 감수성이 있을까? 어떤 머릿속에서 이 생의 감각은 이토록 뾰족하게 튀어나와서 하나의 단어가 되었을까? 어떤 문화에서 이 단어는 버려지지 않고 꺼내쓰여 여태 살아있을까? 도대체 무엇을 추구할 때 그런 단어가 필요한가? 언어마다의 감수성을 추론한다. (조각군15) 목소리와 발음 습관에 따라 유독 말을 알아듣기 힘든 사람들이 있다. 몇 번을 되물어도 그의 소리가 어떤 음절인지 구분할 수 없고, 그것은 나에게 언어로 감지되지 못한다. 상대가 의미를 말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언어로 감지될 수 없는 소리. 그 점에서 그 소리는 개들의 멍멍 소리나 고양이의 야옹 소리와 비슷하다. 누군가의 말소리가 개나 고양이의 짖음과 비슷하다는 말이 논란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지각 속에서 개나 고양이는 인간에 비해 하등한 생물이 아니라 종이 다를 뿐 대등한 개체이기 때문에, 앞선 문장에서 비하의 의도는 전혀 없다. ‘당신이 말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알아들을 수 없어요. 알아듣고 싶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이라고 느껴진다는 점에서 그들은 동일선상에 있다. (조각군16) 인간이 ‘지적’이라고 일컫는 행위들은 현대 인류의 독특한 문화적 생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독특한 문화적 생산물이라는 함은 그것이 허구라는 말과는 다르다. 인류가 거쳐온 역동적인 역사의 맥락에서 개연성 있게 출현한 우연이며, 일련의 도전에 의해 그 개념과 지위가 깨질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맥락, 다른 환경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현대 인류와는 다른 모양과 지위를 가질 것이다. 다른 종이나 다른 문명에서- 어쩌면 인간의 ‘지적 행위’는 고등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발달시킬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것은 어디에나 반드시 적용되는 초월적인 법칙이 아니다. (조각군18) 단어에 의한 구분을 파괴하고 단어의 밖으로 뛰쳐나가보자. 나의 머리카락들. 바람을 맞는 나의 머리카락들은 휘날리며 나의 머리를 치고, 서로를 치고, 공기를 친다. 내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고 있겠지. 사락사락. 이들 중 어떤 이들은 헤어드라이어의 뜨거운 바람에 채 다 마르지도 않은 채로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아무 특이할 만한 일이 없었음에도 두피와의 연결을 상실하고 바닥에 누울 것이다. 이들은 얼마간 바닥에 물질 일부를 의지하고, 주변의 작은 흔들림들에 따라 모양을 바꿀 것이다. 위치를 바꿀 것이고. 그러면서 또 사락사락 소리를 내겠지. 그러다 진공청소기 속으로 빨려들고. 그곳에서 또 얼마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분홍색 일반쓰레기 종량제 봉투에 들어가고. 그곳에 있… 는 사이에 머리카락을 구성하던 것들은 주위로 조금씩 흩어질 것이다. 주변의 먼지와 구분이 점점 모호해지고 뒤섞일 것이다. 그러다 곧 더 이상 머리카락이 아니게 될 것이다. 언제부터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이 아니게 되나…? 나는 이 질문에 다음 문장보다 더 적합한 답을 찾지 못했다. ‘내 눈에 머리카락일 때까지.’ 내 눈에 머리카락으로 인지되지 않을 때까지, 머리카락은 머리카락일 것이다. 단어는 이토록 모호하고, 근거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단어를 마음대로 꿰뚫고 다른 조각을 해볼 수 있다. 단어에 의한 구분을 파괴하고 단어의 밖으로 뛰쳐나가보자. 냉장고(였던 것)와 연루된 열이 보이는가? 방 안을 순환하며 미세하게 공기를 데피고 있는. 바람에 날리는 커다란 실크천처럼, 방 안에서 유동하는 열기. 냉장고(였던 것)를 작동시키는 전력 시스템을 생각하면 냉장고(였던 것)는 거대한 나무의 작은 잎새일 것이다. 여러 집의 냉장고들과 전자기기들- 잎으로 빽빽한 나무. 단어 밖의 가능성을 찾는 시도에서조차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음에 한탄스럽다. 나는 분명 현존하는 단어로 충분히 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지만 그것을 당신에게 전할 단어 이외의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단어로 된 각종 비유와 관념을 버무려본다.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 연결되고, 이 글은 점차 시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보인다. 단어에 의한 구분을 파괴하고 단어의 밖으로 뛰쳐나가보자. (조각군31) 정합성에서 벗어난 자유에서, 솔직함의 들판에서, 대상은 관습적 시선과 이름을 대신하는 발칙한 명명을 얻은 채 질주한다. 질주하는 이가 만드는 바람, 그가 흩뿌리는 냄새. 독자는 그것을 경험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언어를 매체로 쓰는 것의 한계가 실험된다. 단어의 구분에서 완전히 벗어나 언어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잡으려 할 때 언어가 지시하는 구체성은 전달력을 잃는다. 그 부분의 언어조각들은 아마 독자 각각의 상상의 영역으로 미끄러질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와 독자들은 공통의 의미영역에 발을 걸치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공기에 살포시 손을 대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언어와 구체성 사이의 긴장이 적극적으로 탐구된다. 서로를 촉매하기도, 잘라내기도 하는 그 이중성. 그 이중성이 바로 우리 생활의, 지적 능력의 단단한 기반일 것이다. 이 책에서 벗어나자고 외치는 것, 외칠수록 얽매인 힘을 보여줄 뿐인. 그걸 알면서도 또다시 벗어나보자고 외칠 무언가. (해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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